피아노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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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 (Edward Grieg 1843~1907)![]() |
1843 노르웨이 출생 1858 재능을 인정받아 라이프찌히 음악원에 유학 1862 고향 베르겐으로 귀향 1863 스칸디나비아 음악의 정신에 매료(남성적 장엄함) 1866 첫 바이올린 소나타 작곡, 리스트에게 격려 받음 1867 사랑하던 사촌누이 (성악가)와 결혼 1871 크리스티나에 음악협회 설립, 지휘자 활동 1880 음악협회 활동 중지. 순회 연주, 작곡 활동 1907 고향 베르겐에서 사망 ♣ 젊은 시절 라이프찌히 유학 당시 음악원의 악계에는 멘델스존, 슈만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그리그는 보수적 낭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후에 노르웨이(스칸디나비아)적인 음악의 작곡에 몰두하였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극장 부수음악인 [페르귄트] [피아노 협주곡 a단조] 가 있고, 아내를 위한 성악곡을 다수 작곡하였고 피아노 작품들도 상당하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노르웨이 국민주의 감성(민족주의 색채)을 느낄수 있다. |
라흐마니노프 (Sergey Vasilyevich Rachmaninov 1873~1943)![]() |
1873 러시아 귀족 가문 출생 1882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피아노, 작곡 배움 1890 [피아노 협주곡 제 1번] 그의 스승 실로티에게 헌정 1891 피아노 경연대회 1위 입상, 작품 출판됨 1893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추모하는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1895 [교향곡 제1번-dm]작곡 - 실패 1898 런던으로 초빙, 자작연주 성공 1901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작곡가의 입지 1909 미국 순회 연주, [제 2교향곡] 제 1위로 당선 1910 귀국, 피아니스트, 작곡가 활동 1917 러시아 혁명으로 파리로 망명 1918 미국에 정착 1943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미국에서 사망 ♣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영역은 다양하다. 피아노 독주곡, 연탄곡, 관현악곡, 교향곡, 실내악곡등이 있지만. 피아노 협주곡과 독주곡에서 그의 진가를 발휘한다. 작품 특성은 남성적인 다이내믹이 있으며, 화려하고 세련미가 있다. 리스트에 비교하자면 리스트가 현란한 테크닉적인 기교를 과시했다면,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에 있어서 쾌락(활발하고 화려함)을 즐겼다고 말할 수 있다. |
레거 (Max Reger 1873~ 1916)![]() |
1873 독일 바이에른 3월 출생 1907 라이프찌히대학 초빙되어 작곡 가르침 1911 작센의 궁정 악장으로 초빙 1914 예나로 이주. 독일 순회 연주 1916 순회 연주중 뇌출혈로 사망, ‘레거협회’ 설립 ♣ 그의 음악은 순수 절대 음악을 추구한다. 따라서 오페라나 가극 음악보다는, 기악음악, 즉 관현악곡이나 피아노곡, 오르간곡, 무반주 바이얼린 소나타등을 작곡하였다. 이는 당시 표제음악이 유행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음악의 특징은 바하로 거슬러 올라가 대위법적인 화성적 성격이 짙으며, 기존 조성음악에서 가능한 화성을 모두 활용하였다. (조성 음악의 한계가 보이는 시기). 피아노 작품으로는 왈츠 7곡과 바하 주제에 의한 변주곡, 네손을 위한 독일 무곡집, 등이 있다. |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
1811 헝가리에서 10월 22일 출생 1821 체르니에게서 피아노 사사, 바이얼린 사사 1822 비엔나에서 첫 음악회 1827 당시 문인과 예술과들과 접촉 활발 1831 피아노 기교에 매료되어 기교적인 곡들 작곡 1835 제네바에서 백작부인과 동거 (3명의 자녀) 1839 유럽 순방 연주회 [러시아의 2개 선율 아라베스크] 1844 백작 부인과 결별, [발라드 제 1번:1845] 1848 바이마르 대공작의 음악감독, 관현악곡 작곡 1858 바이마르 사직 1861 로마로 건너감 1865 종교적 음악 작곡 1886 7월 31일 바이로이트에서 사망 ♣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은 주로 기교적이며 화려하다. 쇼팽의 음악과 비교할 때, 리스트의 작품은 기교를 너무 추구한 나머지 음악의 화려함에 비해 예술성은 다소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작곡보다는 오히려 편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파가니니의 바이얼린 연주에 감명 받고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파가니니 에튀드는 잘 알려져 있다. [12개의 초절 기교 연습곡], [헝가리안 랩소리]을 비롯한 피아노작품 외에 교향시 부문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
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
1862 프랑스 출생 1872 파리 국립음악원 입학 1876 솔페즈, 피아노, 반주, 작곡에서 두각 1879 피아노 주자로서 연주여행 1884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 수석상 1887 파리에서 상징파 시인들과 교류 1889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타악기 및 동양에 매력 1894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1899 Lily Texier 와 정식 결혼 1902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오페라 완성 1903 피아노곡집 [판화] 1905 바다[La Mer] 완성 1909 파리음악원의 상급평의회의 멤버가 됨 1910 피아노곡 [전주곡집] 종합적인 시기 1914 1차 세계대전 발발, 건강 악화 1918 암으로 숨짐, 파리로 이장 ♣ 드뷔시의 음악의 특징은 복잡한 리듬, 전통적 조성을 포기한 복잡한 화성, 음악에서 색채의 인정등 현대음악의 시작에 자리한다. 또한 그는 관현악법의 명암법, 악기법의 대가로서, 그가 작곡한 서로 다른 악기 파트는 반드시 그가 지정한 악기로라야 곡의 진면목을 알수 있다. 즉 악기를 대체하게 되면 완전히 다른 음악이 되어 버린다. 꿈꾸는 듯한 그의 음악은 미술의 인상파와 흡사하다. 피아노곡으로는 [2개의 아라베스크],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피아노를 위하여], [판화], [어린이 세계], [연습곡집] 등이 있다. 연탄곡집도 다수 있다. |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 1809~1847)![]() |
1809 독일 함부르크 출생
1812 함부르크 점령당해 베를린으로 이주 1818 첫 공개연주회 (자작의 시편가 발표) 1821 피아노 연주 잦음(실내악, 소관현악), 베버, 괴테와 교류 1824 바하의 마테수난곡 악보 사본 입수. 바하에 대한 연구 1825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음. 저명한 음악가와 교류(롯시니) 괴테에게 [피아노 4중주-Op.3] 헌정 1826 [한여름밤의 꿈의 서곡] 1829 바하의 ‘마태수난곡’ 재연 (바하의 재평가 계기), 이후 32년간의 대여행 [무언가] [교향곡 4번-이탈리아] 1836 라이프찌히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받음. 1837 결혼 (지휘자로 활약) 1842 라이프찌히 음악학교 설립 1846 오라토리오[엘리아-Elias, Op.70] 1847 라이프찌히에서 11월 사망 (38세) ♣ 그는 여타의 빈곤함을 겪었던 예술가들과는 달리 부유하고 교양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족함 없는 교육 환경으로 인해, 법률가, 행정가, 음악가 등 실로 그의 직업은 다양했지만, 그가 초창기에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바하의 재발견이었다. 그의 피아노 작품 [무언가] 는 낭만주의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지만, 그의 음악 성향은 절제된 고전스타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 |
1756 오스트리아 짤즈부르크 출생 1761 대중앞에서 연주 (여러도시 음악 순방 연주) 1773 하이든의 음악 접함. 기악음악과 교회음악 작곡 1775 짤즈부르크에서 지휘자. 첫 피아노 소나타와 협주곡 작곡 1777 뮌헨, 만하임, 파리 순방하면서 직장 구함 1779 파리 궁정 오르가니스트 (관현악곡 작곡) 1781 짤즈부르크 궁정 사직, 개인렛슨 시작. 피아노곡 작곡 1783 6개의 현악 4중주 하이든에게 헌정 1784 비엔나에서 인기 절정. 12개의 원숙한 피아노 협주곡 작곡 1786 [피가로의 결혼] 1787 [돈지오바니] 1788 비엔나 궁정 실내악 연주가. 최후 3개의 교향곡 작곡 1789 [클라리넷 5중주-K.581]작곡 1791 [마술피리] [티토의 자비] 12월 5일 비엔나에서 사망 ♣ 어렸을때부터 신동이라 불리우며, 8세부터 수많은 연주 경험을 쌓았다. 당시의 음악가의 신분은 귀족의 후원을 힘입어 활동할수 있는 하인의 위치에 있었는데, 화려한 유년시절의 탓인지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귀족과 잦은 대립) 궁핍함 속에서 요절한 작곡가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라 할만큼 영롱하고 순수한 느낌을 전해주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
무소르그스키 (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 |
1839 러시아의 카레보에서 3월 출생 (귀족 출신) 1852 근위 사관학교에 입학, 즉흥연주에 재능 1856 사관학교 졸업 후 연대 배치, 보로딘과 교류 1858 제대. 친구의 도움으로 피아노곡을 관현악으로 편곡 1859 러시아 여행을 통해 국민주의 형성 1861 농노의 해방으로 경제적 타격 1862 러시아 ‘5인조’ 그룹에 참여. 무료음악학교 개설 1863 운수통신성의 관리가 됨 1867 운수통신성 사직 1869 재무성에 복직하여 관리 생활 1874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초연, [전람회의 그림] 1875 가곡 [죽음의 노래와 춤] 1880 직장 그만둔 후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 1881 그동안의 지나친 음주 습관등으로 폐인 되어 사망 ♣ 무소르그스키는 작곡에 있어서는 주위의 음악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러시아 국민주의적 색채가 강하며, 오페라, 발레음악, 관현악곡, 피아노곡, 가곡등을 썼다. 특히 피아노 작품 중에서는 모음곡인 [전람회의 그림]이 유명한데 여기에는 그의 독특하고 대담한 독창성이 넘쳐나고 있다. |
바하 (J.S.Bach : 1685~1750)![]() |
1685 독일 아이제나하(Eisenach) 출생
1700 루네부르크 성미하엘 교회의 성가대 1703 아른슈타트에서 오르간 주자 1707 뮐하우젠 성블라시우스 교회 오르간주자 (결혼) 1708 바이마르 궁정 오르간연주자 1713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Konzerymeister : 4주마다 새로운 칸타타 작곡) 1717 쾨텐 레오폴드공의 음악감독(Kapellmeister), 기악작품 다수 작곡 1720 부인 마리아 사망 1723 성 토마스 학교의 성가대장 : 수많은 칸타타 제공 1727 [성 마테오 수난곡] 1729 라이프찌히 콜레기움무지쿰의 지휘자 1741 베를린과 드레스덴 : [골덴베르크 변주곡] 1745 [푸가의 기술] 1747 베를린 프레데릭 대제의 궁정방문 [음악의 헌정] 1749 [b단조 미사] 1750 라이프찌히에서 7월 28일 사망 ♣ 바하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 50명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대음악가계로서, 그의 13명의 아들들 가운데을 세 아들 (W.F. Bach, C.P.E. Bach, J.C. Bach)이 음악사에 자주 거론된다. 대부분 유럽의 음악가들이 유럽 전역에서 활동했던 반면에 바하는 그의 출생지를 멀리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루터 정통파의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평생에 걸쳐 기독교적인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의 업적은 12조의 평균율(푸가와 프렐류드), 영국과 프랑스의 조곡이외의 많은 오라토리오, 실내악곡, 칸타타 작품들이다. |
베버 (Carl Maria von Weber 1786~1856)![]() |
1786 오스트리아 올덴부르크 출생 1792 오르간 곡 작곡 1798 오페라 작곡, 피아노 주자로 활약 1804 극단의 악장 1807 루드비히공의 개인비서 (음악에서 떠남) 1810 공금횡령 혐의로 다름시타트로 이주, 오페라[질바나-Silvana] 1811 뮌헨 방문, 작곡 연주 활동에 전념 (구직 실패) 1813 가극장의 지휘자 역임 1817 결혼, 드레스덴의 가극장 지휘자 역임 1821 [자유의 사수] 초연 대성공, 작품 위탁받음 1826 결핵, 생계를 위한 무리한 활동, 런던에서 사망 ♣ 베버는 오페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다. [숲속의 처녀-Das Waldmadchen], [질바나-Silvana] [자유의 사수-Der Freischutz] [오이뤼안테-Euryanthe] [오베른-Oberon] 등이 그것이며, 피아노 작품으로는 소나타, 변주곡, 알라망드, 폴로네이즈, 등을 썼는데 [무도에의 권유]가 익히 알려져있다. |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
1770 독일 본(Bonn)에서 출생하여 세례받음 1792 하이든에게서 사사 1795 비엔나에서 피아니스트겸 작곡가로 데뷔 1799 [피아노 소나타 제8번 - 비창] 1800 청각의 악화 1803 [영웅 교향곡] 1805 오페라 [피델리오] 1806 왕성한 작곡활동, 교향곡 제5번, 제6번, 대규모의 기악곡 1812 "영원한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침묵의 시기 1814 비엔나에서 인기 절정(피아니스트로 마지막 출연) 1818 [피아노 소나타 제29번] 활발한 작품 활동 1823 [장엄미사] 완성 [교향곡 제 9번-합창] 1827 비엔나에서 3월 사망 ♣ 주요 작품은 주로 피아노 음악이었으며, 그의 음악 성향은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한 표현)남성적이다. 베토벤은 최초로 귀족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자립한 음악가이다. 그의 생애를 걸친 작품은 세 시기로 나눌수가 있는데, 이는 고전음악에서 낭만음악로 넘어가는 과정을 그의 작품에서 그대로 반영하여 베토벤이 고전과 낭만을 잇는 다리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1897)![]() |
1833 독일 함부르크 5월 출생 1848 첫 피아노 연주회 1850 연주 여행, 리스트 만남. 1852 [피아노 소나타 제1번, 제2번] [스케르쪼] 1854 클라라 슈만 만남. 4개의 피아노[발라드] 작곡 1857 함부르크에서 피아노 교사. 뎃몰트 궁정 지휘자 1860 리스트의 ‘신음악’에 반대 1862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pf] 1863 무계약, 자유롭게 활동. [독일 진혼곡] 1872 빈 필하모니 지휘 [성 안토니오 변주곡], 피아노 작곡 1879 피아노작품[광시곡][환상곡], 교향곡 꾸준한 작곡 1877 [바이얼린 협주곡] 1893 피아노 소품(6개의 소곡) 1897 비엔나에서 4월 사망 ♣ 브람스는 많은 피아노 작품(카프리치오, 간주곡, 연습곡, 샤콘느, 즉흥곡) 을 남겼으며 합창곡, 가곡 또한 많다. 그는 평생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정장을 하고 산책을 나갈 정도로 자신관리에 철저했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보수적이었다. 그의 음악은 테크닉적인 화려함 보다는 다소 남성적이며 인간적이고 철학적인 깊이를 추구한다. |
쇼팽 (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 ![]() |
1810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3월 1일 출생 1829 바르샤바 여러 귀족들에게 후원 받음 1830 비엔나, 독일에서 연주 1832 파리에서 명성 굳히게 됨, 피아노 개인렛슨. 1836 여류 시인 ‘조르쥬 상드’ 만남, 폐병증세 나타남 1837 영국에 감 1838 폐병이 악화되어 조르쥬 상드와 동거 [24개 프렐류드] 1839 [B♭단조 피아노 소나타] 작곡 1848 파리 혁명, 런던에서 음악회 가짐 1849 10월 17일 파리에서 사망 ♣ 쇼팽은 낭만주의 대표적 작곡가이며 그의 음악은 현실 너머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보여 주는데 완벽한 터치와 기교를 요함은 물론 페달과 템포 루바토의 적절한 구사를 요한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피아노로 노래하는것이었다. 폴란드 출생으로 폴란드가 자랑스러워 하는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연인 조르주 상드(프)를 비롯, 프랑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
1797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월 31일 출생 1808 비엔나 궁정 소년합창단원 1815 성악곡에서 두각, 학교 교사 1818 피아노 교사, [마왕] 출판 1822 [방랑곡 판타지] [교향곡 제 8번 - 미완성] 1823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아간 아가씨] 1824 [죽음과 소녀 현악 4중주] 1825 ‘슈베르트의 밤’ 개최 [교향곡 제 9번] 1827 연가곡 [겨울 나그네], 베토벤의 장례식 입장 1828 마지막 세곡의 피아노 소나타 , 비엔나에서 사망 ♣ 그가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예술가곡이다. 당시의 낭만주의 시대사조를 타고, 서정시 문학이 발달함에 따라 그의 가곡은 인기를 끌었다. 그의 음악의 특징은 여성스럽고 섬세하며, 어둡고, 비관적이다. 가곡의 가사에서도 자주 나오는 단어가 죽음, 고독 등이다. 따라서 피아노 작품을 연주할때도, 레가토에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노래하듯이 섬세하게 이끌어 줘야 하는 부분이 많다. |
슈만 (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 |
1810 독일 작센 출생(부친 서적상, 모친 외과의사)
1821 초기 작곡활동 1826 부친 사망,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률학 전공 1830 파가니니의 연주 듣고 감명. 비크에게 피아노 렛슨 사사, 손가락 다쳐 피아니스트 포기, 작곡에 전념 (op.1~23) 1834 ‘음악신보’ 잡지에서 음악 비평가로 활동 1840 스승(비크)의 딸(클라라 슈만) 과 결혼, 가곡 작곡 1843 라이프찌히 대학의 강사로 잠시 활동 (클라라와 러시아 순회연주) 1847 리더타펠의 지휘자 역임 1853 브람스에 대한 ‘새로운 길’이라는 논문 발표 1854 정신병원에 수용 1856 7월 29일 정신 병원에서 생애 마감 ♣ 슈만이 활동했던 시대는 자유주의가 활발했던 시기이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같은 감수성으로 그의 음악은 심오하고, 아름답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스승의 딸(클라라)과 사랑에 빠져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으며, 당시 브람스와는 클라라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였다. 슈만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무리한 테크닉적인 연습(손가락에 추를 달고 연습)때문에 손가락을 망치고, 결국은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주로 작곡한 분야는 피아노 작품과 예술가곡이다. |
스크리아빈 Alexander Nikolaiewstsch Skrjabin 1872~1915![]() |
1872 모스크바 출생 1888 모스크바 음악원에 피아노과 입학 1893 피아노과 수석 졸업, 자작곡 리사이틀 가짐 1896 자신의 곡으로 유럽순회 연주 성공 1897 피아니스트 베라와 결혼, 조인트 리사이틀 공연 1905 파리로 이주 1910 오케스트라와 순회 연주 1911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발표 1914 런던 방문, 프로메테우스 재연 1915 모스크바에서 악성 종양으로 사망 ♣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는데, 그의 작곡 성향은 후기 낭만주의로서는 가장 개성이 강했다. 즉 신비화음이라 불리는 특유한 화성법을 썼는데, 이것은 인상주의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에 나올 무조 음악(조성이 없는)의 예고였다.(피아노 소나타, 제 9번, 10번에 잘 나와있다.) |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
1840 러시아 보트킨스크 5월 출생
1848 모스크바로 이주 1850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 1859 법률학교 졸업, 법무성의 서기관으로 취직 1861 해외 여행(유럽 순방), 페테부르크 음악원에 입학 1863 법무성 사임 1865 음악원 졸업, 모스크바에서 교편 잡음 1866 [겨울날의 환상-Winter Daydreams] 교향곡 제 1번 1873 [템페스트-The Tempest], 신문의 음악비평 담당 1874 [피아노 협주곡 제 1번-B♭단조] 개성 뚜렷, 연주활동 1877 [백조의 호수], 음악원 제자와 결혼후 신경 쇠약, 요양 1878 음악 교수 사임. 유럽으로 이주, 작곡에 전념 1880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피아노 트리오] 1889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92 [호두까기 인형] 1893 콜레라로 사망 ♣ 그가 빛을 발했던 작품은 주로 발레 음악과 교향곡 분야이다. 무척 내성적이었던 그의 감수성과 러시아 국민주의를 바탕으로 세련된 서정성이 그의 음악의 특징이다. 특히 피아노 독주 작품에 있어서는 의외로 상당히 많은 작품이 있는데, 특유의 세련미, 우아함, 낭만성, 간결함, 등이 잘 녹아 있다. 피아노 협주곡으로서는 제 1번이 가장 뛰어나다. |
하이든 (Franz Hoseph Haydn 1732~1809)![]() |
1732 오스트리아 출생 1740 비엔나 성 스테반 대성당의 성가대원 1759 모르친 백작의 음악감독 (기악곡과 건반음악) 1760 결혼 1766 에스테르하찌 왕자의 음악감독 1768 그의 생애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로 표현됨. 단조의 기악곡 1775 오페라에 관심을 집중 1781 현악 4중주 작곡 (새롭고 독창적) 1791 런던에서 교향곡 no.93~98번 연주 1792 비엔나에서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임 1798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1801 오라토리오 [사계절] 1809 5월 31일 비엔나에서 사망 ♣ 18C후반의 빈 고전파 핵심인물중 한 사람으로서 현악4중주, 교향곡 등의 기악형식의 완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보통 작곡가들이 10곡내외의 교향곡을 쓰는데 비해 그는 104곡이나 써서 (놀람, 시계, 장송, 런던, 고별, 군대 등의 부제 붙음)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린다. |
헨델 (George Friedrich Handel : 1685~1759)![]() |
1685 독일 할레에서 2월 23일 출생 1702 할레 대학의 법률전공, 칼빈 성당의 오르간주자 1703 함부르크에서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 주자 1705 [알미라] 1706 이탈리아에서 교우, 오라토리오, 오페라, 칸타타작곡 1711 [리날도-Rinaldo]의 런던 하노버에서 성공적인 공연 1712 런던에 정착 1717 [수상음악] 캐논에서 음악 감독 1723 궁정교회의 작곡가 1726 영국 귀화 1727 죠지 2세의 대관식 위한 엔텀 작곡 1729 두번째 궁정음악학교 확립 1733 최초의 오르간 협주곡 1737 헨델의 오페라 회사 붕괴 1739 [사울],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12개의 대협주곡 1742 [메시아] 공연 1752 [입다] 시력약화후 실명 1759 런던에서 4월 13일 사망 ♣ 독일 할레에서 태어났지만 주요 활동지가 영국이기에 영국 음악가로 분류된다. 주요 분야는 오페라였지만, 쳄발로 곡들도 다수 있다. 1719년 왕립음악원을 설립하였지만, 그가 공연한 오페라 중 [거지 오페라 - Beggar’s Opera]에서 영어를 사용함으로써(당시 오페라는 라틴어 고집) 왕립 음악원이 해산되게 되고 1729년 새로이 음악원을 설립하였다. 당시 시대에는 오페라 성악가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고, 이로써 가수와 작곡가 사이에 알력이 많았고 극장간 경쟁도 치열하였다. |
메트네르 (Nicolai Karlovich Medtner 1880~1951)![]() |
1880 모스크바에서 출생 (양친 모두 독일인) 1886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배움 1900 음악원에서 금상 수상, 졸업, 루빈스타인상 수상. 1912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한 [옛날 이야기] 1921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순회연주 1951 런던에서 사망 ♣ 러시아 음악사에서 볼 때 메트네르는 결코 국민주의 성향을 쫓진 않았지만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전통에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피아노 작품 [옛날 이야기]는 독특한 그의 개성이 담겨있다. |
히나스테라 (Alberto Evaristo Ginastera 1914~1983)![]() |
1916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
1928 고향 윌리엄스 음악원에 입학 1935 졸업, 작곡부문 금메달 수상, 국립음악원 입학 1936 발레곡 [파남비 Panambi] 작곡 1937 피아노곡 [Danzas Argentinas 아르헨티나 춤곡] 1941 국립음악원 작곡과 교수로 임용됨 1943 발레곡 [Estancia] 발표, 민족주의 색채 1945 미국으로 건너감 1948 아르헨티나 귀국, 국제현대음악협회 작곡가동맹 결성 1952 [피아노 소나타 제 1번] 1958 미국 워싱턴의 미대륙음악제 참가, [현악4중주 No.2] 1961 [미국을 위한 칸타타] [피아노 협주곡 제11번] 1962 고등음악연구소 창설 1981 [피아노 소나타 제 2번] 1982 [피아노 소나타 제 3번] 1983 6월 겐프에서 사망 ♣ 히나스테라의 작품들은 대략 1960년까지의 민족주의적 경향과 그 이후 현대적이며 진보적인 작품들로 구분된다. 음악원 재학시절 작곡한 [피남비], [아르헨티나 춤곡] 등에서 민족주의 색채를 띄며, 그 이후의 작품에는 12음기법과 다조성, 음렬기법, 우연음악 기법들이 자유스럽게 사용되었지만 가혹한 음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그의 악보는 남미에서 출판된 것이어서 국내에서나 미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것이 많다. |
라벨 (Maurice Joseph Ravel 1875~1937)![]() ![]() |
1875 출생 직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 1889 파리 음악원 피아노과 입학 1893 피아노곡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 작곡 1895 [고풍의 미뉴엣], [귀로 듣는 풍경] 1897 포레에게 작곡 배움, 카페연주로 생계 1899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902 첫 실내악곡 스승 포레에게 헌정, 드뷔시 만남 1904 제1 라벨사건 (로마 불공정한 심사 항의한 교수들 사퇴) 1905 [피아노 소나티나] [거울] [스페인 랩소디] 1906 제2 라벨사건 - 그의 레지타티브(낭독조) 가곡 논쟁 1911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1914 [피아노 3중주곡], 1차 세계대전 입대(운전병) 1919 제3 라벨사건 - [라 발스]로 디아길레프와 우정깨짐 1923 [바이올린 소나타] 블루스 리듬 사용 (재즈) 1927 [볼레로] 미국에 초빙됨. 보스턴 악단 지휘 1932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영화음악 [돈키호테]위촉 1933 자동차 사고로인한 뇌질환. [피아노 협주곡]완성 1937 병원에서 뇌수술 도중 사망 ♣ 고전적인 틀 속에서 대담한 화성을 사용하여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둘다 9도 11도를 즐겨썼지만 드뷔시가 몽환적이고 희미한 윤곽을 보인다면 라벨은 구조나 선, 리듬을 명확하게 했다. 평소에 에릭사티와 드뷔시를 존경했으며, 후기의 작품에는 재즈를 흡수하였다. |
알베니스 (Issac Mauel Francisco Albeniz 1860~1909)![]() ![]() |
1860 스페인 출생
1867 스페인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 1872 음악원 피아노과 수석 졸업 1873 미국 순회 연주 1874 독일 라이프찌히 음악원 입학 1878 리스트에게 사사 1879 음악원 수석 졸업, 연주여행 1883 제자와 결혼 1893 [이베리아] 4집 완성
1894 파리로 이주 1898 심장질환 시작, 연주활동 포기 1906 [이베리아]1집 초연 1907 [이베리아]2집 초연 1908 [이베리아]3집 초연 1909 심장 질환으로 사망 ♣ 알베니스는 스페인 국민주의 대표적 작가이다. 피아노를 사용하여 스페인 민속무용이나 리듬과 기타의 음색을 피아노에 흡수시켰다. [이베리아] 는 스페인음악의 최초의 걸작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500여 곡 상당의 작품들이 분실되어 알려지지 않고 있다. |
포레 (Gabriel Faure 1845~1924)![]() |
1845 5월 프랑스 출생
1863 피아노작품 [무언가 op.17] 1879 [바이올린소나타 제1번]초연, [피아노4중주곡 제1번] 1881 [피아노와 관현악을위한 발라드] 1883 조각가의 딸과 결혼, 1886 [피아노 4중주 제2번] 1896 마들레느대성당 수석오르가니스트, 파리음악원 교수 1897 피아노를 위한 [주제와 변주 op.73] 1900 프로메테우스 반주음악 작곡 1905 파리음악원 원장 취임, 개혁 추진, 유럽 러시아 여행 1906 [피아노 5중주 제 1번] 1911 청각 거의 잃음, 피아노[9개의 전주곡 op.95] 1914 오페라 [페네로페] 완성 1919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op.111] 1920 파리음악원 원장직사임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1921 [피아노 5중주 제2번] 1924 [현악4중주곡] 완성후 죽음 ♣ 근대 프랑스 서정파의 거장인 포레의 작품은 성악, 피아노곡, 실내악곡, 관현악곡 등 거의 모든 장르를 포괄한다.피아노곡에는 슈만.쇼팽뿐만 아니라 리스트의 영향도 엿보인다.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스탠더드 레퍼토리는 아닌듯 하지만, 독자적인 선율과 화성적인 감각, 섬세한 시적 감각은 현대 프랑스 피아노문헌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
프로코피에프 (Sergej Sergejewitsch Prokofjew 1891~1953)![]() |
1891 4월 러시아 출생 1896 피아노곡 작곡 [인도풍의 갈롭] 1898 오페라 [거인] 작곡 1904 페테르부크 음악원 입학 (해마다 12곡의 피아노곡 작곡) 1908 현대음악의저녁 모임에 가입하여 작곡 발표 1909 [악마적 암시]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소곡] 1911 [피아노 협주곡 제1번 Db] 1914 [피아노 협주곡 제2번 gm], 음악원 졸업, [신포니에타] 1917 [고전교향곡] 러시아 10월혁명 발발 1920 캐나다 순회연주 1921 [피아노 협주곡 제3번 C] 1923 파리로 이주, [교향곡 제2번] 1929 스코아 악기법 고안 [교향곡 제4번] 1939 [피아노 소나타 제6번 A] 1942 [피아노 소나타 제7번 Bb] 1948 창작태도 소련 공산당에 해명 (제2작곡가 비판사건) 1950 미국소련 냉전 제재 오라토리오 [평화의 수호] 1953 사망 ♣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은 오페라, 교향곡, 관현악곡, 가곡, 피아노 등에 모더니즘의 대담성을 보여준다. 그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화성을 추구했다. 소련 복귀 이후에는 서정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간혹 민족적이기도 하지만, 근대적 선율선, 효과적인 화성법, 색채적인 관현악법, 헤테로포니적 수법을 애용했다. 총 9개의 피아노 소나타와 5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있는데, 그외에도 연습곡, 소곡집, 스케르쪼, 모음곡, 소곡들이 있다. |
생상스 (Charles Camile Saint-Saens 1835~1921)![]() |
1835 프랑스 파리 출생 1846 최초의 공개연주회 1848 파리음악원 입학 1853 생 마리 교회 오르가니스트 1861 니데르메이르 음악학교 피아노교수 취임 1867 칸타타 [프로메테우스의 결혼] 작곡가 위치확립 1868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1871 국민음악회 창립 (프랑스 교향악운동) 1880 관현악곡 [알제리 모음곡] 1886 런던필하모니 위촉 제3교향곡[오르간], [동물의사육제] 1888 모친 사망 (미국, 동양, 아프리카등 방랑 생활) 1891 [아프리카] 1892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 작곡 1896 피아노협주곡 [이집트의 풍] 1921 아프리카 여행도중 객사 (알제리) ♣ 생상스는 프랑스 정서의 독자적인 음악을 추구하였다. 작품은 고전적 형식을 취하고 있고, 우아함과 세련된 색채감, 재치가 담겨있다. 때문에 고전성과 낭만성을 모두 느낄수 있다. 오페라, 교향곡, 관현악곡, 피아노곡, 성악등 다방면에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
거슈윈 (George Gershwin 1898~1937)![]() |
1898 9월 미국 브루클린 출생 (유태계) 1916 자작 가곡 출판 1918 쇼(가수)의 반주 맡음, 노래의 작곡 위촉. 1919 [Swanee] 최초의 히트곡, 뮤지컬[La La Lucille] 1920 레뷔(쇼의 일종)를 위해 이후 5년간 20여 노래 작곡 1924 피아노 콘체르토 위촉받음 [랩소디 인 블루] 1925 화성, 관현악법 새로이 공부, [피아노협주곡 F] 1927 뮤지컬 [Funny Face] 1930 헐리우드 영화 음악 4개 작곡 1931 [그대를 위해 노래부르리 Of Thee I Sing] 1935 오페라 [Porgy and Bess] 1937 뇌종양으로 39세의 나이에 헐리우드에서 사망 ♣ 초반에는 1급 가요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우연히 심포닉 재즈를 위촉받아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다. 이후 재즈기교에 의한 수준 높은 관현악곡과 오페라를 창작하여 미국음악의 자랑이 되고있다. 그의 작품은 서민적인 음악의 이디엄을 간직했으며 거기에 생생하고 자발적인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변화가 많은 깨끗하고 새로운 화성을 추구하여 명랑하면서도 우수가 깃들어 있는 재즈를 만들었다. |
야나첵 (Leos Janacek 1854~1928)![]() |
1854 체코 태생 1865 수도원의 성가대에 들어감 1869 사범학교, 올드 그래머 스쿨 교사로 재직. 합창지휘, 평론 1874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 입학 1876 브르노 클럽 합창단 지휘역임 1880 오스트리아 빈음악원 하계학기 유학. 정식 음악교원 역임 1885 모라바 민요 수집에 착수. 편곡, 출판 (훗날 창작의 원천) 1881 브르노 음악학교 설립, 교장역임 1902 [잡초가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서] 피아노곡 1904 그의 오페라 [예누파] 초연됨 1905 [피아노 소나타 in e] 2개악장 (1924년 출판) 1916 [연가곡-사라진 사람의 일기] 3voice와 피아노반주 1919 프라다 음악원(브르노 분교) 설립. 교장역임 1925 [피아노와 실내관현악을 위한 소협주곡] 1926 [연가곡-슬라브 미사곡] 1928 사망 ♣ 그는 10여개의 오페라와 성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들을 남겼다. 민요를 분석하고 현대적으로 현대적으로 편곡했는데, 대화풍의 독특한 선율법과 5음음계 경향, 음색, 조바꿈, 화성리듬의 구성에서 그의 독창성을 발견할수 있다. 프레이즈들은 귀로 박자의 구획이 어렵고, 또한 셋잇단음표를 많이 사용했다. 19세기 러시아의 리얼리즘문학을 테마로 삼은게 많아서 ‘모라바의 무소르그스키’라고도 불린다. 말년에는 인상주의적 요소도 볼수있다. |
윤이상 (ISangYun 1917~1995)![]() |
1917 경남 통영 출생 1933 일본 오사카 음대 수학 1937 귀국. 통영에서 초등교사 1941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반일활동중 체포 1946 음악교사로 재직 1956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배움 1957 베를린 음대 입학. 작곡 배움 1959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악기를 위한음악]발표 1966 독일에서 그의 관현악곡 [예악]초연. 국제적명성 1967 동베를린사건 한국에서 종신형 1968 [나비의 꿈] 옥중 작곡 1969 구명운동으로 풀려남 1970 베를린음대 교수역임 1971 독일에 귀화 1972 뮌헨 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 [심청] 연주 1981 [광주여 영원히] 1987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1995 독일에서 폐렴으로 사망 ♣ 그는 서양음악의 기교와 스타일, 한국전통음악 '아악'의 미학논리를 통해 만들어낸 자신의 고유의 음을 융합시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부분 속에 전체를,변화 속에서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그의 음악세계는 서구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고 오늘날에는 한국음악과 서양악기의 결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음악은 한결같이 연주하기가 까다로워 초기에 연주자들이 꺼렸지만,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후 국내에서도 잘알려지게되었다. |
부조니 (Ferrucio Benvenuto Bussoni 1864~1924)![]() |
1864 이탈리아 출생
1881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 회원, 자작 오라토리오 초연
1888 바하 오르간곡 편곡(푸가 in D), 1890 op.31 in a로 루빈스타인상. 모스크바음악원 교수역임 1891 미국 연주활동 1894 독일 베를린에 이주 1907 [신음악미학 시론] 이론서 집필. 1913 볼로냐 음악원 원장 역임 1920 베를린 고등음악학교 작곡교수로 근무 1921 [카르멘 주제에 의한 소나타] pf 작곡(브람스영향) 1924 사망 ♣ 오페라, 성악, 관현악곡을 작곡하였고, 피아노 연주의 거장으로서 피아노곡 작곡도 많이 남겼다. 작곡 초기에는 바하, 슈만, 멘델스존의 성향이 강했지만 80년대 중반부터 브람스 영향을 많이 받았고 91년 이후부터는 창작보다는 작곡가들을 연구했다. 그는 과거 대작곡가의 곡을 교정하고 편곡하였는데, 그중 바하와 베토벤의 것은 정평이 나있다. 또한 음악미학과 이론에도 중요한 저술을 남겨 바흐곡에서 페달 사용을 주장했다. 부조니의 작품은 아르페지오를 피하고 공명과 다이내믹을 단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서 오르간의 색채를 창조하는 데 중점을 둔다. |